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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나는 나의 행위와 성향에 대한 원인을 과거에 초점을 두고, 과거의 사건을 토대로 발현되는 현재의 행동을 탐구하며 자아를 이해한다. 내면 속 풀어지지 못한 응어리에 대한 작품을 만들며, 노동집약적인 바느질과 뜨개질의 행위를 통해 과거를 반복하여 상기하고 풀어내려고 노력한다. 어린 시절 기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환경과 동시에 안정감을 부여하는 가정의 모습을 과거의 경험을 품고 있는 푹신하고 보드라운 살갗의 애착인형으로 표현한다.

  반갑지만은 않은 기억을 구태여 상기시키며 내면에 쌓여 있는 부정적 감정들을 풀어낸다. 달갑지 않은 감정들을 작품으로 끌어냄으로써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괴로움을 천천히 덜어내고자 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다시 상처를 재생산하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관계에서는 실수가 잦다. 분명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서는 더 그렇다. 둘 다 처음일 테니. 상처를 준 사람이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로 특정지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아마 사과를 받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닐 터이다.

   내가 온전히 감추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다. 터트릴 수 없는 나의 돌기를 그저 사랑하기 위해 만든다. 이것 또한 내가 자란 환경이고, 나다. 나를 인정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저 나를 사랑하는 거다. 과거의 일은 들춰낼수록 점차 무뎌진다. 한번 생각하면 화나고 분하다. 열 번 생각하면 울고 소리 지르고 싶다. 백번 생각하면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점점 수용한다. 그럴만한 모두의 이유가 있겠지. 이해되는 이성과 다르게 감정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꺼낼 수 없는 과거의 일은 결국 나와 기약 없이 살아가기에 그저 사랑해버린다.

 

   작품 속 형상들은 동그랗거나, 길쭉하고,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 빵빵하다. 나에게 결핍으로 남아있는 해소되지 못한 감정과 응어리들이 함축되어 작품으로 구현된다. 나의 욕망이 작업에 스며들어 있다. 펑 터질 것 같은 분노, 해결되지 않은 감정, 참았던 울음. 무수히 많은 욕망들은 이리저리 뒤엉킨 채 큰 덩어리가 되어 곧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표현된다.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세워가는 작업은 시간을 들여 조각의 구석구석을 쓰다듬게끔 한다. 쓰다듬으며 과거를 되짚어가는 행위는, 어린 시절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해결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이해로 인해 타인을 향하는 미움의 마음은 사라지고 그저 공허로 뻗어간다. 책할 대상을 잃은 채 방향을 상실한 내면 속 부유물은 부푼 채 존재한다. 미움의 대상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여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언제 어디 누구에게 터질지 모른다.

   바느질을 위해 형상을 스케치하고 도면을 분할하여 나누고 그 사이를 바느질로 꿰맨다. 적당히 형태가 만들어지면 솜을 채워넣어 생명력을 부여한다. 계획하고 부지런히 꿰어 나가는 과정은 과거에 대해 돌아보고, 그 경험들이 나를 만든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인과관계가 있듯이, 그 경험이 도면이 되고 시간으로 바느질하여 나의 성질을 갖게 됨과 비슷하다. 바느질로 그 사건들을 엮고 엮으면 날카롭게 잘려 연관성 없어 보이던 천이 높고 두툼하게 세워져 영향력을 과시한다.

   작품들에는 형형색색의 색이 주를 이룬다. 어릴 적 경험에서 생성된 욕망은 대체로 흐릿한 무채색에 가깝지만, 응어리는 현재까지 남아 나와 살아감으로써, 다양하고 튀는 색감으로 생명력을 부여했다. 천으로 인형을 만들어 솜을 채워 넣음도, 생명의 피부처럼 보드랍고 물렁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고여버린 응어리가 있기에 위험성을 표하기 위해 화려한 경계색으로 겉을 치장하는 이유도 있다.

​[돌기로 솟은 미움] 전시 수록 글

[돌기로 솟은 미움]은 일상 속 감정이 폭발한 사건을 계기로 시작한다. 끙끙 묵혀있던 돌기가 터졌다. 나는 그리 화가 날 상황도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분노를 퍼붓고 싶었는지 모르게 마구 화를 냈다. 울며 소리 지르던 그날의 기억은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왜 느닷없이 마구 벅차올라 울분 터지듯 감정을 배출했는가. 거스르고 거슬러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 울던 내 입은 틀어막혀졌다. 배출되지 못한 감정은 마음속 돌기로 솟았다. 과거의 미움은 어떠한 해소도 못 한 채 찜찜한 여드름이 피부에 오르듯 빵빵하게 차올라 발갛게 부어오른다.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을 생각이 없이 여전히 부풀어 있다. 충동적인 감정 분출의 경험을 과거의 기억과 결부시켜, 어릴 적 감정이 억눌렸던 경험에서부터 비롯된 해결되지 못한 내면의 응어리를 솟아오른 돌기로 보여 준다.

 

어린 시절의 환경은 한 아이의 복잡다단한 성향을 일군다. 내가 자란 가정환경 속 욕구 해소의 부재는 방어적, 수동적, 의존적인 ‘성인아이’로 자라게 했다. 미움을 품은 돌기는 내가 상처받지 않게 바깥으로 향하는 가시이자, 내가 의존하는 부모의 영향이며, 동시에 나에게 안정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결핍으로 남아있는 응어리는 천으로 둘러싼 솜인형으로 표현된다. 인형은 아이가 어릴 적 보호자의 부재 속 안정감을 찾기 위한 보호자와 동일시 하는 대상으로써 작품 속 ‘성인아이’인 본인이 의존하는 부모와 환경이 투영돼 있음을 나타낸다. 돌기 형태의 인형은 내가 품은 미움과 그 미움의 대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양가적 모습을 보여준다.

 

천을 자르고 가득 고인 미움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반듯하고 틈이 없게 손바느질한다. 바느질은 천을 뚫는 아픔과 다시금 봉합하는 치유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살갗 같은 천을 바늘로 여러 번 꿰어내는 행위는 과거를 자꾸 상기하고 들춰내어 돌기의 외피를 단단히 만든다.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시간을 들여 돌기의 구석구석을 쓰다듬는다. 일련의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 자아를 이해하고 위로한다.

 

과정 속 되뇌임은 어린 시절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해결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이해로 인해 미움의 기억은 옅어지고 책할 곳을 잃은 채 방향을 상실한 돌기는 부푼 채 존재한다. 미움의 대상은 사라진 채, 경계심만 남는다. 잔뜩 부어오른 돌기는 불현듯 터지지 않도록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괴이한 가시와 현란한 색으로 위험성을 표한다. 덥수룩하게 난 털은 치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보호하며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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