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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Statements 2018-2024

2024

나는 현재의 '나'로 고착되어 해소되지 못한 과거의 기억들을 푹신한 인형의 형태로 제작한다. 내면 속 억제된 감정은 부풀고 뻗어나가 곧 터질 듯한 모습인 유기체 형상의 응어리로 투영된다. 천을 실로 꿰어내며 인형의 외부를 봉합하는 과정을 통해 불완전한 내면을 더욱 단단히 구축하며 손바느질의 반복적인 행위로 과거를 상기하고 쓰다듬는다.

약자에 속한다는 건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둔다는 것과 같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자, 환경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몰락 당한다. 자의 없이 직면하게 된 가정 속 뒤틀린 애정, 보호자의 부재, 환경 속 억압과 강요는 아동-여성으로서 이어지는 약자의 삶을 경험하게 하였다. 작고 나약했던 나를 둘러싼 가정과 외부 환경은 저항조차 하기 힘든 거대하고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환경에서 받은 억압은 결핍으로 남아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이 신체의 형상으로 발현되고, 기호화된다. 뾰족하거나 거대한 상, 둥글고 푹신한 모체와 같은 모습, 바깥으로 뻗어나가고자 하는 팔들로 어머니, 아버지를 상징한 형상이 뒤섞이며, 혼란스러운 유년 시절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나의 작업은 어린 시절의 응어리를 기반으로, 그것을 새로운 생명체로 시각화하는 과정이다. 나는 응어리의 표면을 인조가죽으로 감싸며, 손바느질로 단단하게 꿰맨다. 이 가죽이 단순한 물리적 보호막을 넘어 심리적 경계의 상징으로 작용하도록 한다. 인조가죽은 현실의 가죽을 모방한 인공적인 껍질이지만, 그 다채로운 색감과 질감은 상상 속 새로운 생명체로서 응어리를 재탄생시킨다. 화려한 색감 속에는 독과 위험성 또한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존재들은 타인에게 불안감과 경계를 불러일으킨다. 작품 속 인조가죽은 단순히 응어리를 덮는 껍질이 아니라, 감정을 보호하고, 자아를 형성하며, 외부 세계와 나 사이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조가죽은 인공적이고 매우 다채로운 색감과 질감을 가진다. 인조가죽은 살갗을 모방하는 직물로 생명체의 겉표면과 비슷하다. 비생명적이나 따스한 촉감을 가진 인조가죽은 양가적인 나의 내면 속 혼란을 담은 유기체를 만들기 적절했다. 인공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인조가죽은 단단하고 차가운 시각적 촉감을 유도하며 인위적인 힘을 가진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생명체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이는 스스로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새로운 유기체를 만들고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이다. 내가 의존하고 싶은 새 탄생물의 겉면을 만들어 스스로를 위로한다. 분출과 억압, 표출과 부끄러움의 요소들은 결합하여 겉면이 탄탄하게 메워진 작품으로 완성된다. 유기적인 진화를 거듭한 결과이다.

 

인조가죽은 대체로 화려한 색상과 광택감을 가진다. 주로 자연 속 독을 품은 생물에서 보여진다. 상위 포식자에게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한 요소이며, 사실 그러한 눈속임을 하는 요소이다. 야생에서는 강한 생물은, 눈에 띄지 않고 다른 하위 개체들을 잡아먹어야 하기에 풀과 나무, 흙과 비슷한 색상을 가졌다. 하지만 약한 생물들은, 눈에 띄어 오히려 위협적임을 보여준다. 그러함에 화려한 색과 빛깔은 약자의 색이다. 나는 나의 나를 둘러싼 환경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혹은 나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화려한 색으로 나의 작품들을 덮는다. 작품의 내부는 부드러운 솜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단단하고 거세 보이는 겉표면과 상반되는 것으로, 내면의 유약함을 보여주며, 작품이 지닌 양가성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자 ‘디디에 앙쥐애’는 누군가가 나의 피부를 만지는 것을 느끼고 내가 누군가의 피부를 만짐으로써 '자아'가 탄생하며, 피부자아는 일종의 '심리적 싸개'라고 설명한다. 즉 신체적 접촉, 피부의 접촉, 피부를 만짐으로써 자아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디디에 앙쥐에가 말한 피부자아처럼 인조가죽은 단순한 물리적 보호막이 아니라 심리적 경계를 상징한다. 인조가죽으로 응어리를 감싸며 인공적으로 보호하거나 덮어두는 방식은 그 감정을 보호하고, 더 이상 외부 자극에 쉽게 노출되지 않게 만드는 과정이다. 피부가 자아의 경계로서 기능하는 것처럼, 인조가죽은 감정의 경계로 작용해, 그 응어리가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처럼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조가죽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심리적 방어 기제나 자아의 경계를 시각화한다.

 

작품에서 돌기나 뾰족한 형상이 튀어나오는 부분은 이러한 방어기제를 극대화한다. 그것들은 외부의 위협을 막기 위한 저항의 표현이며,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 돌기와 뾰족한 형상들은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이 외부로 방출된 시각적 형상들로, 약함을 감추려는 강렬한 방어기제의 표현이다. 곳곳에 심어진 부드러운 털 또한 방어기제 중 하나이다. 털은 본디 감추고 싶은 것을 덮거나 보호하고 싶은 것을 숨기기 위해 존재한다. 내면 속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보호하는 동시에, 인조가죽과 동일하게 심리적 경계를 상징한다. 

 

인조가죽은 도면에 따라 여러 조각으로 분할된다. 이후 조각들을 다시 합치기 위해 손바느질한다. 실을 사용해 손바느질을 하는 것이 연속적인 시간, 과거, 현재, 미래를 엮는 역할을 상징한다면, 도면은 시간 속 체감한 경험과 사건을 담은 실질적인 파편화된 피부이다. 분리된 조각들이 다시금 이어지며 만들어진 형상은, 단순히 과거의 감정을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응어리들을 재구성하며 하나의 새로운 유기체로 형성되도록 한다. 그것을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이다. 

 

손바느질의 과정은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하며, 이는 감정을 다루고 치유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반복되는 땀을 한 수 한 수 직접 놓는다. 직물을 튼튼하게 엮기 위해서는, 촘촘히 여러 번 바느질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느질은 천을 뚫는 아픔과 다시금 봉합하는 치유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세워가는 일련의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상기하고, 조각의 구석구석을 쓰다듬으며 자아를 이해한다.

 

직물의 양쪽을 겹쳐 잡고, 실로 지그재그 단단하게 꿰맨다. 마주하고 꿰맨 자리는, 촘촘하게 조여진 실로 인해 두께감이 생기며 튀어 오른다. 이는 마치 쇠를 탄탄히 용접해 붙인 용접비드의 모양이다. 모재와 모재의 완전한 결합을 위해 용접한 부분을 용접비드라고 한다. 결속력을 위해 일정하고 균일한 간격을 유지하며 지그재그로 직조하듯이 용접해야 한다. 인조가죽의 질감은 광택을 띠며 견고한 금속처럼 보이는 시각적 특성을 가지기에, 용접비드와 같은 손바느질로 꿰매며,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튼튼한 갑옷을 표방한다. 실제로는 부드럽고 유기적인 재료인 인조가죽을 사용했음에도, 그 위에 담긴 광택과 용접비드 같은 바느질은 상반된 물성을 나타내면서도 강한 결합을 상징한다.

[아래로 향한 가시 우두머리]

아래로 향한 가시는 어른-아이 관계 속 아이에게 향해지는 억압과 구속을 나타내고자 했다. 작품보다 아래의 위치에서 관람하는 관객들에게 2m가 넘는 작품은 위압의 경험을 제공한다. 제목에서의 우두머리는 권력자이며, 가부장적인 가정환경을 말한다. 어른의 우람한 몸처럼 보이도록 제작하였다. 꼭대기의 은색 부분은 아무리 해도 닿을 수 없는, 무너뜨리기 어려운 머리를 보여주기 위해 단단해 보이는 은색 가죽을 사용하였다. 몸통은 손으로 내려 누르거나, 아래로 자란 가시로 강제로 억누르는 불쾌하고 압력을 행하는 것을 표현했다. 꿰매진 몸통은 용접된 표면처럼 단단하게 보이게끔 여러 도면으로 나누어 손바느질했다. 과거의 나 자신을 위로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을 거치며 노동집약적인 손바느질을 통해 제작하였다. 흘러내리는 실은 과거의 기억과 응어리를 조각 속 단단히 가뒀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부풀어 오른 속을 버티지 못한 채 흘러나오는 나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속홀씨]

속홀씨는 씨앗을 품고 있는 껍데기로, 바깥의 환경이 씨앗이 잘 클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진 뒤, 씨를 바깥으로 퍼뜨린다. 억압된 감정, 응어리들은 하나의 세포처럼 응집되어 바깥의 환경이 조성될 때까지 내면 안에서 익어간다. 겉과 속을 감싸는 검정 실은 씨앗을 감추는 털들로, 부끄러움, 수치스러움, 내밀한 곳을 의미한다.

 

[떫은 포옹]

포옹하는 손과 팔의 모양을 닮아있다. 자라난 가시들은, 포옹할 때 나를 간지럽히거나 떫고 언짢은 감정이 들게 한다. 몸통의 가시는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져 있고, 털이 잔뜩 나 있다. 야수의 손가락처럼 더럽고 불쾌해 보이길 바랐다.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에서 오는 거부감을 보여주고자 했다.

2023

나는 나의 행위와 성향에 대한 원인을 과거에 초점을 두고, 과거의 사건을 토대로 발현되는 현재의 행동을 탐구하며 자아를 이해한다. 내면 속 풀어지지 못한 응어리에 대한 작품을 만들며, 노동집약적인 바느질과 뜨개질의 행위를 통해 과거를 반복하여 상기하고 풀어내려고 노력한다. 어린 시절 기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환경과 동시에 안정감을 부여하는 가정의 모습을 과거의 경험을 품고 있는 푹신하고 보드라운 살갗의 애착인형으로 표현한다.

반갑지만은 않은 기억을 구태여 상기시키며 내면에 쌓여 있는 부정적 감정들을 풀어낸다. 달갑지 않은 감정들을 작품으로 끌어냄으로써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괴로움을 천천히 덜어내고자 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다시 상처를 재생산하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관계에서는 실수가 잦다. 분명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서는 더 그렇다. 둘 다 처음일 테니. 상처를 준 사람이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로 특정지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아마 사과를 받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닐 터이다.

내가 온전히 감추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다. 터트릴 수 없는 나의 돌기를 그저 사랑하기 위해 만든다. 이것 또한 내가 자란 환경이고, 나다. 나를 인정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저 나를 사랑하는 거다. 과거의 일은 들춰낼수록 점차 무뎌진다. 한번 생각하면 화나고 분하다. 열 번 생각하면 울고 소리 지르고 싶다. 백번 생각하면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점점 수용한다. 그럴만한 모두의 이유가 있겠지. 이해되는 이성과 다르게 감정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꺼낼 수 없는 과거의 일은 결국 나와 기약 없이 살아가기에 그저 사랑해버린다.

 

작품 속 형상들은 동그랗거나, 길쭉하고,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 빵빵하다. 나에게 결핍으로 남아있는 해소되지 못한 감정과 응어리들이 함축되어 작품으로 구현된다. 나의 욕망이 작업에 스며들어 있다. 펑 터질 것 같은 분노, 해결되지 않은 감정, 참았던 울음. 무수히 많은 욕망들은 이리저리 뒤엉킨 채 큰 덩어리가 되어 곧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표현된다.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세워가는 작업은 시간을 들여 조각의 구석구석을 쓰다듬게끔 한다. 쓰다듬으며 과거를 되짚어가는 행위는, 어린 시절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해결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이해로 인해 타인을 향하는 미움의 마음은 사라지고 그저 공허로 뻗어간다. 책할 대상을 잃은 채 방향을 상실한 내면 속 부유물은 부푼 채 존재한다. 미움의 대상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여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언제 어디 누구에게 터질지 모른다.

바느질을 위해 형상을 스케치하고 도면을 분할하여 나누고 그 사이를 바느질로 꿰맨다. 적당히 형태가 만들어지면 솜을 채워넣어 생명력을 부여한다. 계획하고 부지런히 꿰어 나가는 과정은 과거에 대해 돌아보고, 그 경험들이 나를 만든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인과관계가 있듯이, 그 경험이 도면이 되고 시간으로 바느질하여 나의 성질을 갖게 됨과 비슷하다. 바느질로 그 사건들을 엮고 엮으면 날카롭게 잘려 연관성 없어 보이던 천이 높고 두툼하게 세워져 영향력을 과시한다.

작품들에는 형형색색의 색이 주를 이룬다. 어릴 적 경험에서 생성된 욕망은 대체로 흐릿한 무채색에 가깝지만, 응어리는 현재까지 남아 나와 살아감으로써, 다양하고 튀는 색감으로 생명력을 부여했다. 천으로 인형을 만들어 솜을 채워 넣음도, 생명의 피부처럼 보드랍고 물렁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고여버린 응어리가 있기에 위험성을 표하기 위해 화려한 경계색으로 겉을 치장하는 이유도 있다.

​[돌기로 솟은 미움] 전시 수록 글

[돌기로 솟은 미움]은 일상 속 감정이 폭발한 사건을 계기로 시작한다. 끙끙 묵혀있던 돌기가 터졌다. 나는 그리 화가 날 상황도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분노를 퍼붓고 싶었는지 모르게 마구 화를 냈다. 울며 소리 지르던 그날의 기억은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왜 느닷없이 마구 벅차올라 울분 터지듯 감정을 배출했는가. 거스르고 거슬러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 울던 내 입은 틀어막혀졌다. 배출되지 못한 감정은 마음속 돌기로 솟았다. 과거의 미움은 어떠한 해소도 못 한 채 찜찜한 여드름이 피부에 오르듯 빵빵하게 차올라 발갛게 부어오른다.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을 생각이 없이 여전히 부풀어 있다. 충동적인 감정 분출의 경험을 과거의 기억과 결부시켜, 어릴 적 감정이 억눌렸던 경험에서부터 비롯된 해결되지 못한 내면의 응어리를 솟아오른 돌기로 보여 준다.

 

어린 시절의 환경은 한 아이의 복잡다단한 성향을 일군다. 내가 자란 가정환경 속 욕구 해소의 부재는 방어적, 수동적, 의존적인 ‘성인아이’로 자라게 했다. 미움을 품은 돌기는 내가 상처받지 않게 바깥으로 향하는 가시이자, 내가 의존하는 부모의 영향이며, 동시에 나에게 안정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결핍으로 남아있는 응어리는 천으로 둘러싼 솜인형으로 표현된다. 인형은 아이가 어릴 적 보호자의 부재 속 안정감을 찾기 위한 보호자와 동일시 하는 대상으로써 작품 속 ‘성인아이’인 본인이 의존하는 부모와 환경이 투영돼 있음을 나타낸다. 돌기 형태의 인형은 내가 품은 미움과 그 미움의 대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양가적 모습을 보여준다.

 

천을 자르고 가득 고인 미움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반듯하고 틈이 없게 손바느질한다. 바느질은 천을 뚫는 아픔과 다시금 봉합하는 치유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살갗 같은 천을 바늘로 여러 번 꿰어내는 행위는 과거를 자꾸 상기하고 들춰내어 돌기의 외피를 단단히 만든다.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시간을 들여 돌기의 구석구석을 쓰다듬는다. 일련의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 자아를 이해하고 위로한다.

 

과정 속 되뇌임은 어린 시절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해결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이해로 인해 미움의 기억은 옅어지고 책할 곳을 잃은 채 방향을 상실한 돌기는 부푼 채 존재한다. 미움의 대상은 사라진 채, 경계심만 남는다. 잔뜩 부어오른 돌기는 불현듯 터지지 않도록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괴이한 가시와 현란한 색으로 위험성을 표한다. 덥수룩하게 난 털은 치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보호하며 숨는다.

2022

‘Squeezing Fruit’은 사회구조의 다양한 양상 속 억압되고 혼란을 겪는 청년들의 현상황을 표현하였다. 작가의 작품은 비치볼과 끈으로 이루어져있으며, 비치볼은 끈이 세게 조일 수록 점차 부풀어 빵빵해진다. 혹여나 볼이 터진다면, 볼이 머금고 있던 묵은 공기가 온 공간을 휩쓸 것이다. 결코 끈의 승리로 볼 수 없다.

아기는 어릴 적 부모와 살을 맞대며 체온과 촉감, 심장박동을 나눈다. 이를 통해 아이는 안도감을 느낀다. 부모가 잠시 자리를 비울 경우 아이는 안도감을 느낄 애착 대상을 찾기 시작하고, 그 결과로 부드럽고 푹신한 인형을 찾는다. 털실과 솜으로 이루어진 푹신한 인형과 같은 모습으로 제작된 열매는 아이를 품는 외부의 영향을 형상화하며, 열매가 다시금 누군가의 영양분이 되고 또 다른 개인의 열매로 이어지는 환경의 순환을 보여준다.

2021

​[열매가 맺히는 곳] 전시 수록 글

줄기 맡에 딴딴히 여문 열매가 주렁주렁 아래로 늘어진다. 굽이진 줄기를 따라 내려와 땅의 이면을 본다. 뿌리는 깊게 흙을 쥐고 양분을 가릴 것 없이 빨아들인다. 체나 거름망 따위는 없다. 그저 처한 상황 속, 있는 그대로를 취한다. 애정의 손길로 자라난 열매는 탐스럽고 알알이 가득 차기 마련이다. 하지만 후미진 곳 마구 자란 열매는 대개 앞날이 험하다.

 

개인마다 각각 저마다 열매를 맺는다. 우린 세상에 숨과 울음이 터져 나올 때부터 외부로부터 영향과 자극을 받는다. 걷는 것부터 말을 떼는 것, 집단에 적응하는 것, 그리고 살결로 느끼는 모든 환경을 체득한다. 처한 상황은 거를 틈도 없이 하루는 지나가고 쌓여 무차별한 양분이 된다. 그렇게 먹고 자란 날들은 내면의 열매를 맺는다. 주변의 온갖 여건을 빨아들여 열매를 피우는 나무처럼, 개인은 경험한 외부의 영향이 함축된 열매를 만든다.

 

언젠가 무르익은 열매는 누군가에게 먹혀 영양분이 되거나, 생명력을 줄 수 있는 에너지를 갖는다. 잘 익은 열매는 개인이 외부로 영향력을 뻗을 수 있는 상태에 미친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외부의 영향은 바깥에서 한 개인으로, 그리고 다시 외부로 내뱉어지고 되풀이된다.

 

나는 개인의 내면 속 부유하는 열매를 형상화한다. 열매는 여러 실이 어우러진 둥그런 형태로 위에서 아래로 매달려 있다. 뜨개질과 스킬자수 latch hook 를 활용하여 형형색색의 실을 한데 엮고 묶는다. 한 올의 실마다 개인이 겪어온 외부의 영향들을 품고 있다. 엮일수록 끈질기고 단단해지는 실처럼, 지나온 모든 날은 매듭지어 완전한 내면을 만든다.

 

실은 안에서 엮이며 바깥을 향해 무수히 뻗는다. 뿜어지는 실 가닥은 열매의 에너지를 보여 준다. 개인을 자라게 한 환경이 외부에서 개인으로 흡수되고, 다시 밖으로 향하는 흐름을 실의 방향으로 드러낸다.

2020

나는 내면의 부유물을 나만의 시각으로 설치와 드로잉으로 표현한다. 내가 형상화한 내면의 떠 있는 부유물에는 여러 색상의 실들이 한데 엮어 어우러지거나 바깥을 향해 무수히 뻗어있다. 나는 실들을 하나하나 직접 엮으며 작업한다. 한 올의 실마다 내가 겪었던 외부의 영향들을 품고 있다. 이러한 실들은 서로 엮여, 내면을 더욱더 단단하게 조여주거나 새롭게 조합되어 여러 패턴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은 안에 있는 에너지를 금방이라도 내뿜을 준비를 하고 있다. 외부의 수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라난 내가, 이제는 반대로 외부로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서의 시작을 준비하는 위치에 있기에, 그 속의 잠재된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이전까지 계속해서 내면의 종유석 작업을 해왔다. 어릴 적 기억 속 아픔이 고착되어 딱딱한 종유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어릴 적 트라우마나 외로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과거에 머물러있는 것보다 과거를 활용해 다시 세상으로 선한 영향을 주고 싶다. 응어리는 계속해 남아있지만 곱씹는다고 풀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활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실수와 상처가 반복되지 않도록 세상에 다시 말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로인해 작품 속 과거 경험으로 인한 상처를 남들에게 돌려주지 않도록 행동하는 에너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잠재력을 담고자 했다.

[옭아맨 응어리]

방 한가운데 위치한 작품 <옭아맨 응어리>는 천장에서부터 내려와 넓게 퍼진 실들이 허리짬에서 좁아지다가 다시 땅으로 향하며 넓어진다. 그리고 천장으로 퍼진 실들은 마치 방 또한 자신의 일부가 된 듯 사면의 벽을 타고 감싼다. 실을 엮어 만든 <옭아맨 응어리>는 무질서한 사슬의 연결로 이루어졌다. 실들은 엉키고 꼬여 하나의 커다란 종유석의 형상을 만든다.

 

종유석 속엔 나의 아주 사적인 물건들이 위치한다. 여러 색들의 레고들은 사슬에 꽉 맞게 끼어있다. 이것은 나의 어린시절을 투영하는 오브제이다. 혼자 남겨진 시간동안 장난감들로 집과 사람들을 만들어 역할놀이를 하던 기억이 종유석 속 존재한다.

 

나는 종유석의 천천히 덩어리가 고착되는 형성과정을 개인의 내면의 응어리가 고착되는 과정과 동일시한다. 개인은 각자 어렸을 적 경험과 같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자신만의 종유석을 만들어 낸다. 내면의 응어리가 형성될 때, 한번 자극이 일고 난 뒤 쉽게 털어버리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이 차근차근 쌓여 거대한 응어리를 이뤄버렸다면 나의 내면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다. 실이 마구 엉킨 듯, 더는 다시 풀어내기 어렵다.

 

<옭아맨 응어리>는 검정과 밝거나 어두운 갈색을 띠고 있다. 이는 실에 날염하여 만들어 낸 색감이다. 여러 불규칙한 색들은 개인의 하나의 응어리가 형성될 때 외부로 인한 다양한 경험과 자극이 스며들어 갔음을 의미한다. 늘 상 보내던 하루와 건네던 말들이 잊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녹아서 계속 나와 살아가는 것이다.

2019

내면은 즉 무의식, 일반적으로 각성하지 않은 상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자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무의식은 개인의 내면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으며 쉽게 본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의 모든 행위는 깊은 내면의 무의식으로부터 끌어져 나온다. 무의식은 개인이 생애를 살아가며 지나쳐온 모든 시간을 압축하고 있으며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무의식, 즉 한 개인을 형성한다.

 

나는 이러한 무의식, 내면이 마치 석회동굴과 같다고 생각한다. 지하수는 석회암 지반 아래로 흐르며 석회동굴을 만들고 오랜 시간 동안 하나의 종유석을 형성한다. 여기서 지하수는 외부로부터의 영향과 자극이며 종유석이 형성되는 것은 그로 인한 경험들이 쌓여 개인의 무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일생동안 꾸준한 자극을 받으며 개인의 내면, 즉 각자 몸속의 종유석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내면의 종유석에는 쉽게 잊고 말아버리는 일주일 전 점심 메뉴처럼 사소한 것부터 잊을 수 없는 유년 시절의 아픔까지 담고 있다.

 

나는 동굴을 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작업한다. 내가 만든 동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동굴 속 실제 종유석이 아닌 묘한 모습의 종유석을 볼 수 있다. 색색의 블럭들, 오래된 일기장 등 평범하고 오래된 나의 물건들이 종유석이 형성되듯 해체되어 켜켜이 쌓여있다. 이것은 뒤섞이고 쌓여 나의 ‘내면’을 형성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들로 만든 종유석은 나의 어린 시절 취미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환경까지 투영해서 보여준다. 혼자 노는 것을 즐겼던 아이, 아이를 혼자 남겨 둔 부모, 부모가 맞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 아이가 혼자 남을 수밖에 없었던 환경, 그 사이 자라서 벌써 커버린 아이.

 

설치 작업인 ‘deep space’의 공간은 낮은 입구로 인해 들어가기 힘들며, 들어가서도 허리를 곧게 펴고 일어설 수조차, 두 다리를 뻗을 수조차 없는 답답한 밀폐공간이다. 어둡고 축축한 그곳은 누군가에겐 불쾌하고 불편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익숙하고 아늑한 편안한 공간일 수 있다. 또한, 깊은 바다 속 혹은 우주 속 홀로 남겨진 외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혼자만의 공간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작가는 관람객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유의 공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식의 공간, 불편하고 외로움의 공간을 제공한다.

2018

나는 어린 시절 혼자 보내던 시간들을 꿈이라는 무의식에 공간에 의존하여 지냈다. 길고 공허한 시간들을 훌쩍 보내기에는 잠드는 법이 가장 쉬웠다. 잠이 들어서는 한 편의 영화 같은 꿈을 자주 꾸곤 하였다. 한 왕국에 공주가 되는 꿈, 무서운 괴물에게 계단에서 쫓기는 꿈 등.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꿈속에서 꿈을 인지하는 법을 배웠다. 꿈을 스스로 조종하고 원하는 꿈을 꾸는 방법을 말이다. 이것을 흔히 ‘자각몽’이라고 말한다. 그 뒤로 나는 꿈이 단순한 상상이 아닌 나의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어렸을 적 경험을 되새기며 내면에 대한 탐구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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